찬란한미래
오신혜
익숙지 않은 마스크 때문인지 자꾸 안경에 김이 서렸다. 담당 간호사를 도와 동생이 누운 침대를 검사실로 밀고 가는 동안 김이 서린 안경을 이리저리 흔들어 봤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그 희뿌연 안경이 꼭 우리 가족의 미래인 것 같아 마음이 불안했다.
갑자기 쓰러진 녀석의 검사결과는 급성 신부전증이었다. 녀석의 나이는 고작 스물일곱이었다.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망연자실할 여유도 없었다. 투석을 시작한지 두 달 만에 동생은 사람구실을 못할 정도로 망가졌다. 방법은 신장이식뿐이었다.
신우염을 앓고 있던 나는 신장기증을 하기에 부적합했다.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신 후, 엄마처럼 우리 남매를 키운 고모가 이식을 하시겠다고 자원하셨다. 죄송한 마음 때문에 검사를 받겠다는 고모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그러나 하루하루 나빠지는 동생을 보다 못해 결국 이식을 진행하게 되었다.
고모는 의연하게 입원을 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사고가 나고 단촐 해진 세 식구 중 누구도 잃을 자신이 없었다. 이미 사랑하는 사람을 너무 많이 잃은 후였다.
이식 수술을 하던 날, 세상에 단 둘 남은 가족을 모두 수술실에 들여보내고 애간장이 끊어지도록 울며 기도를 했다. 제발 더는 누구도 내 곁에서 데려가지 말라고. 무사히 돌려보내 달라고. 온갖 신들의 이름을 불러대며 초조한 시간을 겨우 견뎠다.
예정된 시간을 훨씬 넘기고 나서야 두 사람이 돌아왔다. 그저 살아 돌아왔다는 것이 감격스러워 고된 병원 생활도 힘든 줄 몰랐다. 간병인을 쓸 처지가 못 돼 둘 다 내가 직접 돌보느라 녹초가 되었다. 그래도 두 사람이 살아남은 것이 감격스러웠다.
다시는 뿌연 안경 같은 미래가 없을 줄 알았다. 성공적으로 이식을 마쳤으니 이것으로 끝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면역억제제와 스테로이드 부작용이라는 불행이 또 동생을 찾아왔다.
살아남기는 했지만 동생은 더 이상 이십대의 건장한 청년이 아니었다. 부작용이 관절을 망가뜨려 바로 설수조차 없었고, 피부는 온통 고름으로 뒤덮였다. 녀석은 휠체어 없이 움직일 수 없는 후천적 장애인이 되었다. 그러자 점점 방에 틀어박혀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이식된 신장이 제 역할을 하려면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다. 식단과 약 먹는 시간을 지켜야 하고, 일정한 운동도 해야 했다. 그러나 동생은 이런 모습으로는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먹지도,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점점 상태가 악화되었다.
어떻게 살린 목숨인데. 결혼도 하지 않고 우리 남매만 키워온 고모를 봐서라도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다. 달래도 보고, 을러도 봤지만 동생은 완강했다. 그저 어둠속에서 혼자 있고 싶다고 했다.
더는 방법이 없어지자, 나는 무턱대고 녀석을 휠체어에 실어 밖으로 끌어냈다. 눈부신 햇살을 보고, 살랑거리는 바람을 느끼면 삶에 대한 의지가 다시 살아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동생을 데리고 무작정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아무 의욕이 없는 녀석은 멍한 눈으로 휠체어에 앉아 이리저리 흔들릴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근처 강변에서 동생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신기한 마음에 녀석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휠체어를 탄 몇 명의 청년들이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장애인 배드민턴 팀 이름이 여러 장비와 운동 가방에 새겨져 있었다. 신체적 한계를 이겨내고, 배드민턴을 치는 그들에게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동생은 한참이나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행히 동생은 다리 관절이 집중적으로 망가지는 바람에 팔은 비교적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고, 승부욕이 강한 녀석에게 이보다 좋은 운동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쭈뼛쭈뼛 청년들에게 말을 걸었다. 땀으로 얼룩진 얼굴을 닦던 그들이 환한 미소로 동생을 반겼다. 오랜만에 또래와 대화를 는 녀석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집에 돌아온 동생은 내가 조금씩 챙겨준 용돈으로 배드민턴 채를 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마구 뛰었다. 펌프를 움직일 때 물이 잘 나오게 하기 위해 한 바가지의 물을 붓는 것을 마중물이라고 한다. 배드민턴이 동생 인생의 마중물이 될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동생은 꼬박꼬박 배드민턴 모임에 나갔다. 내가 따라가서 이것저것 챙겨주고 싶었지만 녀석이 완강하게 거부했다. 아직은 누구에게도 운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했다. 고모와 나는 동생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말없이 운동복을 세탁하고, 장비를 챙겨주었다.
그렇게 몇 달이 흐르자, 동생이 옷장을 뒤적거리며 예전에 입던 옷들을 찾았다. 몸이 마르면서 입지 못하게 된 옷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녀석의 가는 팔에 근육이 조금 붙은 것 같았다. 불그스름하게 생기가 도는 얼굴이 아프기 전의 모습처럼 건강해보였다.
운동을 시작하면서 동생은 식단표와 약 먹는 시간을 철저히 지켰다. 몸을 돌보지 않으면 계속 배드민턴을 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자 이식된 신장도 거부반응을 이기고 적응하기 시작했다. 검사결과를 들은 고모와 나는 부둥켜안고 방방 뛰었다.
규칙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것이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생활 속에 스며든 운동이 부리는 마법은 놀라웠다. 죽어가던 동생을 살리고, 멈출 뻔 했던 신장을 다시 뛰게 만들었다.
동생의 상태가 안정되어가자 고모와 나도 다시 일상을 회복했다. 그러자 녀석이 친선시합에 우리를 초대했다. 동생이 속한 배드민턴 모임은 친목을 위해 매년 시합을 열고, 가족도 초대해왔다고 했다. 한 번도 운동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고모와 나는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시합이 열리는 날 아침, 미리 대관한 체육관은 금세 열기로 가득 찼다. 아이들이 아빠들을 응원하기 위해 준비한 플랜카드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마침내 시합이 시작되었다. 한참 뒤 차례가 다가오자 녀석은 긴장된 표정으로 배드민턴 채를 고쳐 잡았다. 셔틀콕을 받아치기 위해 녀석의 몸이 활처럼 휘었다. 그 진지한 몸짓에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게 동생이었다. 무엇이든 진지한 태도로 성실하게 열심히 하는 것이 녀석의 삶이었다. 망가진 몸속에 갇힌 채 스스로를 잃어버렸던 동생이 어둠을 극복하고 자신을 찾아가는 모습이 자랑스러웠다. 몸을 움직이는 동안 녀석의 마음에도 단단한 근육이 붙은 덕분일 것이다.
시합을 마치고 우리는 녀석을 데리고 근처 쇼핑몰에 들렀다. 동생에게 잘 어울리는 새 운동복을 사주고 싶었다. 그 동안 제대로 적응을 할지 몰라 대충 못 입게 된 옷을 입고 운동을 했었기 때문이다.
새로 산 운동복을 입은 동생은 여전히 매일 배드민턴 채를 잡는다.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잊지 않고, 더 성장하기 위해서다. 이제 우리 가족의 미래는 더 이상 뿌옇지 않다. 녀석이 배드민턴 채를 잡고 삶의 의지를 불태우는 한, 그 무엇보다 찬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