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아라
아빠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날의 사고는 갑작스러우면서도 너무도 태연하게 우리 가족을 찾아왔다. 아침잠에서 깨어나지 못해 비몽사몽 꿈과 현실 사이를 헤매던 그 때 불쑥 예고도 없이 나타났다. 다급한 엄마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켰고 울부짖는 엄마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얼른 구급차를 불러 아빠를 병원으로 모셔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에 가득 찼다. 구급차가 오고 아빠는 곧 병원으로 실려 갔다. 나도 병원을 쫓아가고 싶었지만 무거워진 두 발이 차마 떼어지지 않았다. 나는 무슨 정신으로인지 그날까지 마무리하기로 한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병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골든타임에 병원에 도착했으니 괜찮을 거라는 기대가 무색할 만큼 상황은 심각했다.
아빠는 그날 이후로 일상을 온전히 잃어버렸다. 중환자실, 일반병동, 재활병원을 오가는 생활을 시작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몇 차례의 수술과 재활치료가 계속되는 나날이었다. 가족의 일상은 아빠가 중심이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병원 생활이 7년째 되던 해였다. 아빠에게 아주 새삼스럽고 놀라운 일상이 찾아왔다. 아빠가 제주도로 떠나 3일 간 올레 길을 걸어 올레 걷기 축제에 참가하겠다고 한 것이었다. 그것도 함께 입원했던 재활병원에 친해진 환자들과 함께. 뇌졸중 후유증으로 아빠는 오른쪽 팔과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아빠의 반쪽 몸은 봄날이었지만 다른 반쪽 몸은 한 겨울이었다. 게다가 뇌를 다쳐서 언어와 인지 능력을 잃었고, 시신경을 다쳐 시야마저 좁아졌다. 좁아진 시야 탓에 혼자서는 제대로 걸음을 떼지 못할 만큼 두려워했다. 곁에서 붙잡아 주며 함께 걸음을 걸어도 보도블록 위조차 걷지 못했다. 걸음이 불안해서인지 휘청거리며 넘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걸음을 떼는 데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아빠가 제주도라니 그저 놀라웠다. 아빠의 제주행에는 휠체어도, 보호자도 없었다. 뇌졸중 환자들끼리만 의지해 제주도까지 떠나야만 했다. 다행히도 제주도에서는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한다지만 서울을 어떻게 떠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용기가 생겼던 것일까.
제주로 떠나는 그날을 위해 아빠는 조금씩 집밖을 나서며 걷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모든 것이 두려웠을 텐데 아빠는 멈추지 않았다. 집에서 10분도 채 걸리지 않은 지하철역까지 가기 위해 1시간이 넘도록 길 위를 걸었다. 지하철 역사 내의 엘리베이터를 찾아 걷고, 엘리베이터가 없을 땐 에베레스트보다 높게 느껴졌을 계단 난간을 붙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출입문과 역사 내의 좁은 틈에서조차 두려움을 느꼈던 아빠는 지하철 안에서 중심을 잡고 섰다. 그렇게 지하철을 타게 되었고,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넘어지지 않는 법을 터득해갔다. 1년이라는 준비 끝에 아빠는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빠는 3박4일간 우직하게 올레를 걷고 돌아왔다. 비가 내리고 강풍이 불어도 포기하지 않고 계획된 거리를 걸어 올레축제에 참여하고 돌아왔다. 우직하게 올레를 걷고 집에 온 아빠의 얼굴엔 생기가 가득했다. 아빠는 한 손으로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며 사진 속 순간들을 열심히 말해주고 싶어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을 때마다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언어를 잃은 입술로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올레를 함께 걸었던 이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을까. 올레에서 돌아온 아빠를 보며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진 속에, 기억 속에 남은 올레의 순간들이 아빠의 일상을 조금이나마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이라 믿었다.
아빠는 달라졌다. 올레를 걸은 뒤로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듯했다. 가족들에게 의지했던 불안감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그래도 아빠는 혼자서 밥을 먹고, 몸을 씻고, 잠을 잤다고 했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상을 올레를 통해 되찾은 것이었다. 여행을 그저 일상의 쉼으로만 생각했던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올레가 아빠를 성장시켰다는 게 놀라웠다. 사실 이전까지 나는 아빠를 장애를 가진 환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되도록 많은 걸 아빠에게 맞춰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빠의 제주행 이후 나 또한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아빠에게 모든 걸 맞춰줄 것이 아니라 아빠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진짜 아빠를 위한 것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아빠의 변화 덕분에 나도 시선이 달라졌다. 장애는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불편함이라는 걸 인지하게 되었다.
불편함을 극복하려 아빠는 꾸준히 노력했다. 그 노력의 결과는 10년 만에 우리 가족은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아빠가 아픈 뒤로 여행을 생각할 만큼의 여유도 없이 하루를 살아내야 했던 우리였다. 하지만 제주도를 오가며 아빠는 달라졌고 우리 가족은 새로운 도전에 나서게 됐다.
지난 여름 우리 가족은 제주도로 떠났다. 느린 걸음이지만 지하철을 나와 김포공항으로 향했고, 비행기를 타고 제주공항에 내렸다. 늦은 휴가를 즐기는 많은 사람 속에서도 우리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운전을 못 해 대중교통으로 이동해만 했지만 누구 하나 힘들어하지 않았다.
제주도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부터 우리는 새별오름으로 향했다. 일몰과 일출이 예쁘고 30분 정도의 시간이면 오름 정상에 오를 수 있어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는 곳이었다. 519m의 오름이었기에 너무 힘들이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나는 아빠를 잘 알지 못했다. 예전보다 불편함이 덜했기에 나는 아빠의 걸음과 몸 상태를 과대평가했던 것이었다.
평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불룩하게 솟은 오름 앞에서 나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에서 걷기 편한 오름이라고 해서 찾아왔는데 그야말로 낭패였다. 아빠와 한 번도 여행하지 않았다는 게 너무나도 티가 나서 부끄럽고 속상하기까지 했다. 높다란 오름 앞에서 나는 다른 곳으로 되돌아가자고 권하기도 했다. 차라리 제주도의 바다를 보며 물놀이라도 하는 게 어떨까 하면서.
그렇지만 아빠는 오름을 향해 걸어갔다. 아빠를 격려하며 엄마는 한 걸음씩 한걸음씩 걸음을 떼었다. 아빠는 아주 천천히 좁은 길을 올랐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그렇게 오름을 온몸으로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다. 우리와 비슷하게 출발한 다른 관광객들도 가파른 언덕에 숨을 헐떡였지만, 고개를 들어보면 이미 저만치 앞서 사라져 버렸다. 한 스무 걸음을 걸으면 멈추고 오름 중턱에 앉아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혔다. 오름 중턱까지 올라오자 자칫하면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 같다는 두려움도 들었다. 그렇다고 내려가기에도 모호한 높이. 안 그래도 새별오름을 오르다 다쳐서 119에 실려 간 사람의 기사를 봤던 터라 나의 걱정은 배가 되었다. 몸의 중심을 놓치면 바로 굴러갈 것 같은 아찔함을 느꼈다. 새별이라는 예쁜 이름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살벌한 높이였다. 아빠는 포기하지 않았다. 앞서 걷는 엄마의 어깨에 의지하며 한발 한발 마침내 새별오름의 정상에 도달했다. 스스로 대단하다는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으면서.
아빠는 또 다시 나를 일깨워줬다. 포기하지 않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온몸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삶이 힘들다 느껴지더라도 스스로를 믿고 나아가면 결국엔 목적지에 갈 수 있다는 걸 알려준 아빠에게 꼭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