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매거진

제2회 스토리텔링 공모전 가작 - 큰언니 왼손은 이티(ET)를 닮았다
2018.01.03
큰언니 왼손은 이티(E•T)를 닮았다
-김희정
 
  큰언니 왼손은 이티(E•T)를 닮았다. 이티는 1982년에 개봉한 영화 제목이다. 외계인이라는 뜻도 있다. 그 당시, 아이들이 있는 집에는 이티 인형 한두 개는 있었다. 도시에 비해 문화 보급이 상대적으로 느린 시골에도 그랬다. 하지만 나는 이티 인형을 집에 들이지 않았다. 내 눈에 이티는 전혀 귀엽지 않았다. 내가 그런 느낌을 가진 까닭은 큰언니의 조막손 때문이었다. 흐물흐물한데다가 울긋불긋한 핏줄이 보이 손등, 사이사이가 오그라들고 붙어 작고 두툼하고 오글쪼글한 손가락, 노르스름한 고름이 고여 응고된 색깔로 툭 불거진 손톱, 하얀 오른손과 대조되는 살갗 등. 언니의 왼손은 기괴했고 거북스러웠다.
  언니 왼손이 언제부터 그랬는지 궁금함을 풀어준 건 엄마였다. 언니도 나도 스무 살이 넘었을 무렵이었다. 언니 왼손은 태어났을 때부터 그러지는 않았다고 한다. 어느 덧 50년 전에 있었던 이야기다. 어느 겨울, 우리집 주인댁 어르신의 제삿날이었다. 엄마는 주인집 부엌과 우리집 부엌을 바쁘게 오갔다. 제사 음식을 장만하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우리 식구는 초가집 단칸방에 세 들어 살았다. 아버지는 집주인네 농사일을 돕고 엄마는 집주인네 허드렛일을 해주며 근근이 먹고 살던 시절이었다. 마당에 서서 초가집을 바라보면 일자형의 한 지붕 아래 주인집 부엌은 오른쪽에 우리집 부엌은 왼쪽에 있었다. 서로의 부엌 안이 보이지 않는 구조였다. 우리집 부엌에서 주인집 부엌으로 가려면 마당이나 흙마루를 지나야했다.
  엄마가 우리집 부엌 아궁이에 마른 소나무 가지를 넣고 있을 때였다. 주인집 마님이 엄마를 불렀다. 마님은 곧 친척들이 들이닥칠 것이니 음식 준비를 서두르라고 엄마를 재촉했다. 눈썰미가 있고 손놀림이 빠르고 음식 솜씨가 대단한 엄마였지만 등에 업은 갓난아기를 어르고 달래며 불을 때고 전을 부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엄마는 포대기를 풀었다. 업고 있던 언니를 안아 포대기에 싸고는 우리집 부엌에 내려놨다. 주인집 부엌에서 부치다 만 전을 얼른 뒤집어 놓고 올 요량이었다. 우리집 부엌 아궁에서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시루에서는 시루떡이 쪄지고 있었다.
언니의 울음소리가 엄마 귀에 들렸을 때 언니는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 있었다. 언니는 포대기에서 꼼지락거리다가 혼자 아궁이 속으로 굴러 들어간 것이다. 언니는 두 살이었고 온몸에 화상을 입었다. 엄마는 언니의 화상 치료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산골 외딴집 소작농인 부모님은 부지런히 일했으나 가난했고 돈은 없었다. 그 때는 농촌의 대부분이 그러고 살았다. 게다가 병원은 너무 먼 곳에 있었다. 제 때에 언니의 화상 치료와 관리를 못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초가집 마당 끝에 심겨진 나무에 살구꽃과 복숭아꽃이 피었다 지고 감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열리고 붉은 동백꽃도 피었다가 떨어졌다. 1년 터울로 작은 언니가 태어나고 뒤를 이어 내가 태어나고 동생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님은 언니 손을 돌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행히 화상의 정도가 약한 데는 빠르게 회복됐다. 하지만 화상의 정도가 가장 심했던 언니의 왼손은 조막손이 됐다. 꽃이 피고 지고 계절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언니 손은 그대로였다.
  우리 식구 가운데 언니 왼손에 대해 의문을 표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언니 손이 그러하다고 하여 언니를 힘든 일에서 제외시키지 않았다. 동정하지도 않았다. 물론 언니도 부모님과 식구들의 태도에 투정을 부리거나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다. 손이 이러하니 시키지 말아 달라고 하거나 못하겠다고 하거나 힘들다는 등의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큰언니는 부모님이 일하러 나가시면 동생들을 돌보고 밥을 짓고 빨랫감을 대야에 담아 머리에 이고 산길을 걸어가 방죽에서 손빨래를 해왔다. 산에 가서 땔감을 모아왔고 황소를 들로 데리고 나가 풀을 먹이고 돌아왔다. 밭의 풀도 멨고 김치도 맛깔스럽게 담갔다. 5남매의 장녀인 언니는 다른 형제에 비해 일을 많이 했고 잘했다. 언니는 유머도 풍부했다. 언니는 친구도 많아 우리집에 놀러온 친구들은 자주 웃었고 즐거워했다. 언니는 책 읽기도 즐겨했다. 친구한테 빌려온 적도 있었지만 학교 앞 서점에서 사온 책이 많았다. 빈궁한 엄마한테 기어이 돈을 가져가 책을 사왔다. 언니의 중학교 성적은 우수했지만 언니는 집 근처 고등학교로 진학을 했다. 공부를 잘한 언니 친구들을 따라 대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로 가지 못했다. 그때도 역시 집안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언니가 고향을 떠나게 된 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였다. 언니는 친척이 있는 서울로 올라갔다.
  나중에야 알았다. 언니의 해맑은 웃음 뒤에 숨어 우는 눈물이 녹아있었다는 것을. 깨달음은 왜 세월을 앞서가지 못하는 걸까. 말하지 않고 표현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사랑과 아픔을 알 수 있다면,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도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니가 결혼하기 얼마 전이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막 취직을 했는데 그것이 나의 노력 때문이라고 흐뭇하게 여길 즈음이기도 했다. 언니 물건을 정리해주다가 우연찮게 언니 일기장을 몰래 보게 됐다. 언니의 일기장이었다. 언니는 거의 매일 일기를 썼다. 일기장에는 가족에게 털어놓지 않은 사연으로 가득했다. 언니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내 손과 친구들 손은 다르게 생겼다. 내 왼손은 내가 봐도 이상하다. 그래서 친구들이 나를 놀리는 걸까. 내가 친구들을 해롭게 하는 존재일까 나는 내 정체성이 혼란스럽다. 하나님은 왜 내 손을 친구들과 다르게 만드셔서 나를 슬프게 하실까.”
 
  서울에 올라온 언니는 청계천 평화시장 근처에 있는 봉제 공장에 취직했다. 남자 바지를 만드는 가내 공장이었다. 언니는 그 곳에서 몇 년 동안 보조로 일하다가 봉제 공장을 몇 군데 더 옮기고 또 몇 년 후에야 재봉틀을 다뤘다. 그렇게 번 돈으로 동생 넷을 공부시켰다. 언니의 일기는 나를 한없이 작게 했다. 부끄럽게 했다.
 
“시골뜨기인 내가, 서울에서 처음 배운 것은 세상에서 비빌 언덕은 죽기를 각오하고 일을 하는 것이다. 죽기를 각오한 사람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무서울 게 없다. 서울이나 시골이나 사람 사는 것은 매양 같다.”
 
  언니가 모아놓은 일기장은 두 박스였다. 서울에서 같이 자취를 했고 언니가 회사에서 퇴근 후 늦은 밤이면 밥상 위에 스프링 노트를 올려놓고 벽에 기대어 앉아 뭔가를 끄적거리는 걸 본 적이 있으나 그렇게 많은 양이 있는 줄은 몰랐다.
 
“내 삶은 수많은 수치와 모멸감, 불공평, 의문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삶을 견딜 수 있는 힘은 가족이다. 나를 아무렇지 않게 대한, 불쌍하고 짠하고 그러면서도 숨기고 싶은 치부가 아닌, 가족의 일원으로 여긴 부모님과 형제들을 잘 먹고 잘 되게 해주고 싶은 간절한 열망이다. 거기에 하나님 덕분이라는 말을 얹자니 왠지 낯간지럽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다. 하나님 덕분이다.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 비천하고 남루한 삶을 살았고 굽이굽이 돌아갈 때 목 놓아 불렀으나 침묵하여 원망하고 있을 때 내 영을 통해 들려주신 말씀. 내 존재가 너무나 하찮게 느껴져 홀로 슬피 울 때마다 하나님은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지명했다. 너에게는 너만의 특별함이 있다. 그건 세상 무엇과도 견줄 수 없다. 너로 인해 세상은 빛난다’ ”
 
  세월이 흐르고 의술도 좋아지고 우리 식구는 가난을 통과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잘 살게 됐다. 언니의 조막손을 수술할 기회도 왔다. 그런데 언니는 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냥 그렇게 살겠다고 했다. 그러고 언니에게 사랑의 계절이 왔다. 꽃잎이 눈처럼 휘날리는 날, 언니는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을 하면 언니의 삶이 평탄해지리라 우리는 기대했다. 하지만 언니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언니의 유쾌함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언니는 여전히 밝았고 변함없이 부모님과 가족을 사랑했다. 자신을 희생시켰고 힘든 일은 자처하여 해냈다. 아들과 딸을 낳아 예쁘게 키웠다.
  4년 전이었다. 하루는 내가 전화로 물었다.
 
“언니, 공부할 생각 없어?”

언니는 말했다.
 
“이 나이에 뭔 공부? 금방 알았던 것도 돌아서면 생각이 안 나.”
 
언니는 잠시 뒤 말을 이었다.
 
“등록금도 만만치 않잖아?”
 
  언니는 20대에 대학에 합격하고도 중퇴를 했다. 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첫 등록금을 대주겠다고 언니를 설득했다. 언니는 마지못한 듯 수락했고 사이버 대학교에서 상담 심리학을 공부했다. 언니는 올 2월에 졸업장을 받았다. 졸업식장에서 나는 처음으로 언니의 왼손을 잡았다. 어릴 때부터 잡아보고 싶었던 그 손이었다. 언니의 왼손은 내 손안에 쏘옥 들어갔다. 언니는 손을 빼려다 가만히 있었다. 언니 손은 기괴하거나 거북스럽지 않았다. 이티처럼 귀여웠다. 언니는 지금 대학원 진학과 상담사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 공부를 더 깊이 있게 하여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나는 언니의 제 2막 인생을 응원하고 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