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매거진

제2회 스토리텔링 공모전 특별상(에이블뉴스상) - 고난이 변하여 나의 소망이 되고
2018.01.03
고난이 변하여 나의 소망이 되고
 
- 김태욱
 
  나는 가끔 길거리를 지나는 무수한 사람들을 보며 생각하곤 한다. ‘저 사람들중에는 나와 같이 장애를 가진 사람도 아니면 장애가 없는 사람도 있겠지?’라고 말이다. 나는 현재 정신장애 3급의 장애인이다. 그러하기에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며 살아가는데 있어서 내 자신이 좀 민감한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내가 처음 정신질환을 앓게 된 때는 중학교 시절이었다. 선친께서 교통사고를 당하여 돌아가시게 되고 난 후 그 충격의 여파로 우울증을 앓게 되었던 것이다. 과거에는 그때 왜 내 자신이 운명이라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한 어리석음을 범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 운명을 받아들이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결국 극심한 우울증으로 인하여 학교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하였고 중학교를 자퇴하게 되었다. 병세가 깊어가는 우울증으로 인하여 나는 16세때인 1994년 2월 서울대학교 병원 신경정신과 병동에 처음 입원을 하게 되었고, 그 후로도 계속 입,퇴원을 반복하게 되어 같은병원에 7차례나 입원을 하게 되었다. 내가 자주 입원을 하게 된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우울증이라는 정신질환의 잦은 재발로 인하여 자살충동을 느끼고 자해를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부엌에 있는 과도로 손목을 그을때도 있었고, 수면제를 다량으로 복용하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나는 어머니에게 발각되어 입원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잦은 입원으로 인한 입원비 부담으로 인해 가정경제형편은 나빠지기 시작했고 결국은 2002년 3월에 비교적 입원비가 저렴한 경기도 오산에 위치한 정신요양원에 입원하기에 이르렀다. 그와 동시에 나는 정신장애 3급 판정을 받은 장애인이 되었다. 정신요양원에 있을 때 너무나도 괴로워 쇠창살 사이로 나부끼는 차가운 겨울바람 쐬며 갇혀있는 서러움을 못이겨 내 가슴을 찢었다. 가슴이 찢어져 흐르는 피로 물들여진 눈물을 흘리며 해가 먹구름에 가리워 빛을 뿜어내지 못함으로 인하여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과 같은 씁쓸한 좌절을 맛봐야 했다. 정신요양원에서 퇴원을 할 때쯤 되어 나는 거울을 보며 나 자신에게 말했다. ‘이젠 일어서야해.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수는 없어. 일어서야 해.’ 하며 나 자신을 다독거렸다. 2004년 12월 나는 경기도 오산에 위치한 정신요양원에서 퇴원을 하였다. 그리고 마음을 굳게 먹고 곧바로 중졸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그리고 비로소 2005년 8월 나는 우수한 성적으로 중졸 검정고시에 합격 하였고, 그 후 바로 고졸 검정고시를 준비하여 그 이듬해인 2006년 8월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08년 4월경 나는 나와 같은 정신장애인들을 정성껏 돌보겠다는 생각으로 경기도 양주시에 위치한 신경정신과 병원에 ‘환자보호사’로서 정신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취업을 하게 되었다. 병원직원으로 있었지만 기분은 왠지 내가 입원해 있는 것처럼 편하게 느껴졌다. 가장 좋았던 것은 그 곳에 입원한 환우들의 특성을 잘 알기에 어색하거나 두려운 점은 없었다는 것이었다. 환자들중에는 알콜성 치매로 입원해 계신 노인분들도 있었다. 그 분들은 용변을 못가리시기에 시간마다 확인하고 기저귀를 갈아 줘야 했다. 그 노인들의 용변을 치울때도 나는 직원이라기보다 자원봉사자라고 생각하며 일을 하니 더럽다는 생각은 조금도 안 들었다. 병원 하루일과 중에는 밖으로 산책을 나가는 시간이 있었다. 환우들과 함께하는 산책시간이 나는 너무나도 행복했다. 푸른하늘 아래 봄 바람 콧등 스치며 꽃내음 화사할 때 환우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와도 같은 웃음 지으면 나의 마음은 봄에 피는 진달래꽃과 같이 화사해 졌다. 그리고 입사를 한지 2년후인 2010년 5월 나에게 일생일대의 최고의 고비가 찾아 왔었다. 보호사들은 밤에 서로 교대로 잠을 자며 야간근무를 한다. 나는 야간근무를 하면서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환우들의 취침상태를 살펴보려고 병실을 30분마다 확인을 하며 돌아다녔다. 그런데 내 주머니속을 확인해보니 장애인복지카드가 없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잠을 자고 일어났던 침상 주변을 찾아보게 되었고 여기저기 찾아봐도 없었다. 그리고는 그 어두운 곳에서 손전등을 켜고 병동내 바닥 곳곳을 찾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안그래도 처음 입사를 할 때 정신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숨겼건만 장애인복지카드가 병원안에서 없어졌다면 누군가가 주워서 볼 것이고 결국 내가 정신장애인이라는 사실이 들통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나는 마음이 너무 조급해 졌고 어떻게 해서든지 찾으려고 했다. 등줄기에 땀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고 입안이 바싹바싹 마를 정도의 간절한 마음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불행히도 끝내 장애인복지카드는 찾지를 못했다. 시간을 보니 새벽 5시였다. 6시가 되면 환우들이 기상을 하는 시간인데 나는 도저히 병원에 있을 수가 없어서 옷을 갈아입고 병원에서 몰래 빠져나와 곧장 집으로 도망치듯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에는 그 동네에 지하철과 버스가 다니지 않는지라 택시를 잡아타고 서울까지 오게 되었다. 시간이 가면 갈 수록 마음은 조마조마 했고 결국 나는 병원일을 그만두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오전 10시쯤 되었을까? 병원에서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받을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받게 되었다.
 
“여보세요.”
“김 보호사님, 장애인복지카드 잃어버리셨죠? 그렇다고 근무하시다가 무책임하게 꽁무니를 빼시면 어떻게 해요?”
 
목소리를 들으니 간호과장님이었다.
 
“지금 얼른 병원으로 오세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죄인이 된 심정으로 병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병원에 도착을 하였을 때 원무과 직원이 '원장실로 들어가 보세요.' 라고 말했고 나는 원장실로 들어갔다. 원장님께서는 내 장애인복지카드를 건네시더니
 
“김 보호사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오래도록 성심성의껏 일을 해주셨고 김 보호사님께서 환우들을 사랑하는 마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김 보호사님만 괜찮으시다면 비록 정신장애인이실 지라도 저는 김 보호사님과 함께 계속 일을 하고 싶습니다. 일 계속 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바로 이때다 싶어서 대답했다.
 
“네,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이런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바랍니다. 근무중에 갑자기 사라지시면 절대 안 되죠.”
 
하고 당부하셨다. 자초지종을 알고 보니 아침에 간호과장님께서 출근을 하시며 간호사실 책상 아래에 떨어져 있는 내 장애인복지카드를 주으셨고 그럼으로 인해 병원장님에게 까지 전해진 것이었다. 아마도 간호사실에서 야간근무를 하며 주머니속에 있는 병동열쇠를 꺼냈다 넣었다 하다가 장애인복지카드가 쏠려나와 바닥에 떨어진 것 같았다. 그런줄도 모르고 캄캄한 병동 복도에서만 찾으려고 했으니 찾을리 만무했다. 그래도 누군가가 나는 정신장애인이지만 나의 성실성을 인정해 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2014년 11월까지 그 곳에서 일을 하다가 그만두게 되었고 지금은 서울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2학년에 재학을 하며 나와 같은 정신장애인들과 평생토록 함께 하고자 정신보건 사회복지사의 꿈을 꾸며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타인에게 정신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없이 무슨일이든 할 수 있다는 인상을 심어준 내 자신이 너무나도 대견스러웠다. 아마도 그것은 병원과 정신요양원에서 입원생활을 하며 맛보았던 고난의 힘이 컸다고 생각하고 있다. 구약성경 욥기서에 보면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과도 같이 되어 나오리라.’ 라는 말씀이 있다. 그 말씀을 상고하며 나는 오늘도 예전에 받았던 고난이 변하여 나의 소망이 되었고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을 찾은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다가올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간절히 품고 있는 이유는 허황되지 않은 진정한 소망은 이루어 질 수 있기에 소망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기흔한 장미꽃의 아름다움은 내가 가진 장애로 인하여 소유할 수 없으나 초라함 지닌 할미꽃이 되어 보기 드물어 귀한 가치 지닌 채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