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매거진

제3회 스토리텔링 공모전 우수상 - 슬픔이여, 날아가라
2018.02.12
슬픔이여, 날아가라
박종언
 
꿈이었을까? 아주 긴, 죽음만큼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난 느낌이다.
 
20세기가 끝나던 1999년 나는 브라질에 있었다. 유학이었지만 어쩌면 생의 고통을 피하려는 도피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곳에서 나는 죽음과 마주했다. 모든 일상에 끼어드는 총 소리, 길고 긴 비명소리, 누군가의 죽음. 나는 그 죽음이 두려웠다.
 
그 죽음은 나의 불안을 시퍼렇게 일깨웠고 그곳에 오래 머물수록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고통과 두려움에 빠져 유학 4년 만에 허겁지겁 귀국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상담을 받고 내가 조현병(정신분열)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이 병을 받아들이는 데 긴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대인공포증과 공황장애를 숨겨가며 나는 기자생활을 했다. 정치인들을 만나고 필요한 취재원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면서 생을 채찍질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나는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천애의 절벽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일에 대한 강박증적 집착과 끝 모를 불안. 꿈이었으면 싶었다. 내 삶 자체가 온몸으로 피 흘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결국 기자를 그만 뒀고 빈곤이 따라왔고 어느날 나는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는 나를 마주했다.
 
“술을 마시고 싶은데 돈이 없습니다. 조금만 도와주세요.”
 
어떤 이는 “젊은 사람이 일을 하지 않고 구걸을 하냐”고 꾸짖었고 어떤 이는 낙엽 같은 지폐 몇 장을 내게 건넸다. 그 돈으로 술을 마셨고 비가 내리는 날 하늘을 보며 엉엉 울었다. 그때 겨울은 참 길었다.
 
눈이 내리려는 듯 시퍼런 하늘을 인 저녁이었다. 길을 걸었다. 목적지도 없었다. 성에가 낀 작은 술집 안에 사내 서너 명이 매운탕을 놓고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입김에 의해 흐려진 그 술집 안을 창문 너머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들이 혹시 나를 발견하고 나를 그 술자리에 초청해 내게 한 잔의 술을 따라주고 따뜻한 매운탕 한 그릇을 줄 수 있다면, 그랬다면 나는 생(生)의 많은 비밀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아니, 감사하다는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창밖의 나를 눈여겨보는 이는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슬픔에 빠져, 혹은 기쁨에 넘쳐 술잔을 돌리고 있었다.
 
돈이 없었다. 어느 날 길거리 전봇대에 붙은 ‘장사하실 분 모집, 일당 5만 원’이라는 쪽지를 보았다.
 
찾아간 곳은 경기도 하남시의 허허벌판에 컨테이너로 만든 건물이었다. 사람들이 사과를 분주하게 손질하고 있었다. 나는 낯선 장소에 내린 영혼처럼 쾡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회사가 제공하는 트럭에는 사과가 가득이 담겨 있었다. 이 트럭을 타고 나가 판매한 만큼 일정 마진을 내가 가져가는 것이었다. 회사에 내는 사납금과 내 일당은 십대 일 정도일까. 나는 그곳에서 1년 가까이 일했다. 트럭을 몰고 자정 넘어서야 회사에 트럭을 놓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이 계속됐다.
 
그러나 병은 끊임없이 내 주위를 맴돌았다. 사람을 무서워하며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온 신경을 써야 하는 고된 정신적 통증이었고 나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곳을 나와 피자집에서 또 일 년 간 일을 했다. 사장이 내게 피자 만드는 법을 가르쳤고 나는 군말 없이 피자를 토핑했고 가끔 사장과 술을 마셨다. 그곳을 나왔을 때 내 손에는 백만 원 정도의 돈이 있었을 뿐이다.
 
다시 방황했다. 술로 탕진하는 시간은 더 길어졌고 나는 나를 못견뎌했다. 인터넷에 알코올중독 회복기관을 쳤고 내가 살던 S시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교회를 찾았다. 교인 서너 명에 불과한 개척교회였다. 나는 내가 갖고 있던 돈 4백만 원 전부를 교회에 바쳤다. 내가 알코올의존증에서 헤어날 수만 있다면 그것이 그리 대수랴. 어느 날 목사는 내게 다른 곳을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나가라는 의미였다. 돈을 다 바쳤고 돈이 없는 나는 까맣게 목사의 옆 얼굴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인천으로 와서 꽃게잡이 배를 탔다. 선원 6명과 함께 여름 꽃게 성수기에 바다로 나가 ‘와이어’와 그물을 잡아당기며 한 철을 보냈다. 고래 뱃속 같은 배의 갑판 아래에 몸을 누이면 몸은 고단했으나 마음은 차분해졌다. 파도소리가 배 안을 가득 채웠다. 나는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만이라도 행복할 수 있다면 괜찮다고, 배를 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제자리걸음이었다. 고통스런 생이 가파른 파도소리를 내며 나를 엄습했다. 어느 점집에 들었다. 운명(運命)이 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사주관상가는 내게 “당신은 잘 될 것”이라고 말했다. 거기까지였다. 나는 여전히 하혈하듯 헐겁게 서 있었다.
 
어쩌면 젊은 시절에 내가 지불해야 할 고통의 영수증을 신에게 제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자신이 지불해야 할 생(生)의 증명서는 하나씩 갖고 있다. 그 고통을 회피하면 세월을 돌아 다시 그 고통의 지불독촉장이 날아오는 것이리라.
 
그리고 어떻게 살았는지 더 이상 기억나지 않을 때, 나는 한 대학병원 정신병동에 입원했다. 가족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병원 입원은 내게 사치였을 것이다.
 
대학병원에서 2개월, 다른 민간정신병원에서 4개월을 보낸 후 나는 성북구의 한 정신장애인 공동체 주거시설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나처럼 정신장애를 가진 이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업무를 나눠서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세탁을 하고, 낮에는 정신건강복지센터 같은 시설에서 프로그램을 하고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오는 날들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조금씩 회복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니, 나는 느끼지 못했지만 그들과 온몸으로 부딪히면서 나는 아주 작은 문틈으로 희망이라는 햇살이 들어오는 걸 깨달았다.
 
그곳에서 3년을 보낸 후 다시 구로구에 있는 한 주거시설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나는 잃어버리고 있던 글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을 쓰고 싶었다. 아주 긴 이야기, 죽음보다 깊은 연옥에서 보냈던 시간들을 언어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글은 얼어붙은 고드름처럼 데면데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설의 시설장이 어느 날 나를 불렀다. 정신장애인 문학회가 있는데 가보지 않겠냐고.
 
봉천역의 한 지하실에서 토요일마다 정신장애인들이 모여서 글을 쓰고 발표를 하고 있었다. 그곳을 다니며 나는 백일장과 정신장애인 문학공모전에서 모두 11차례의 상을 받았다.
 
오랜 시간 글을 피했었다. 그러나 고통이 긴 비명소리처럼 지난 후에 나는 내가 가야 할 길 중의 하나가 글쓰기라는 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글을 쓴다는 건 기억한다는 것이다. 내가 태어난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삶은 온전히 내 책임이다. 그리고 글을 통해 그 기억을 타자(他者)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이러한 삶도 있으며 우리는 그 삶을 존중해야 한다고. 그것은 곧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그 시설에서 나오고 얼마 후 나는 인천의 한 임대주택에 입주하게 됐다. 청약통장을 만들어 2년 정도 납입한 후였다. 나에게 ‘당신은 집을 구할 자격이 있다’는 통보를 받았고 임대빌라 5층의 집을 갖게 됐다. 방 두 개에 거실이 있는 내게는 ‘너무나도 큰’ 공간이었다. 나는 비로소 혼자가 된 것이다. 혼자가 된다는 건 고독해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고독을 통해 성장한다. 그 성숙함이 타자를 이해하게 되고 생의 부조리함에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도 있게 된다.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인간학의 질문이 있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또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는 존재다. 인간은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존재자다. 그래서 동물은 존재하지만 인간은 실존한다.
 
어느 날 정신장애인 단체에서 연락이 왔다. 정신장애인 인권을 옹호하고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인터넷신문을 만들자는 제의였다. 과거 기자 경험을 살려 함께 하자는 거였다. 나는 편집국의 데스크 지위를 부여받고 그 신문 창간 사업에 동참했다. 우리는 신문기자 자격을 정신장애인으로 한정했다. 우리가 우리 목소리를 내야 하고 아주 늦더라도, 조금 모자라더라도 같이 발을 맞춰 걸어가야 한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내년 일 월에 우리는 창간호를 낼 계획이다.
 
아버지는 나의 고통과 병을 이해하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어느 날은 밭에 가서 일을 하다가 내 운명을 생각하며 펑펑 울었다고 했다. 발발이 내게 전화를 했고 나는 나 자신도 견딜 수 없는 고통 때문에 전화기에 대해 울기도 했다.
 
“아버지, 고통스러워요.”
“(시골에) 내려와라. 나랑 농사나 짓다가 우리 그렇게 살다 가자.”
 
나는 울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거라면 어차피 희망도 없어야겠지요, 아버지” 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내려오라고 했다. 희망도 포부도 다 버리고 농사나 짓고 살자고 있다. 어느 추운 겨울, 아버지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 병상에 누워 잠들어 있는 그를 불러보았다.
 
“아버지.”
 
그가 가자미 같이 눈을 떴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았다. 아, 아프도록 차가운 손. 아버지, 나는 당신을 파먹으며 이 세상을 떠돌았어요. 내려오라는 그 말도 멍든 꽃처럼 괴로웠어요. 죄송해요. 제가 너무, 너무.
 
지난 시절에 비해 조금은 안정된 시간들이다. 못다 한 늦은 숙제처럼 나는 책을 읽고 있다. 가끔은 전화가 온다. 정신장애인과 관련된 토론회가 있는데 발제를 해 달라거나, 토론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이다. 나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그 토론회에 참여한다.
 
그리고 정신장애인을 대표하는 공적 자리에 나가는 만큼 나는 나를 치장하고 행사에 참여한다. 정신장애인들의, 그 고통의 담론이 정치적 의미를 획득하고 그것을 통해 사회적·제도적·문화적 차별을 해소할 수 있다면 나는 먼저 치유된 자로서 그 저항의 자리에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니체의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 중 ‘치유된 자’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한다. 치유는 그리스어 ‘노스토스’에서 온 어휘다. 노스텔지어는 고향을 그리는 사무치는 마음이다. 치유된 자는 그 고향으로 돌아가는 자다. 무엇을 위해? 자기 삶의 사명을 위해. 그러므로 치유된 자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할 수 있으며 자신이 생애에 해야 할 일을 알게 된다.
 
나도 그렇게 걸어가고자 한다. 내 삶의 사명을 향해. 걸어가는 길에 바람도 불고 혹은 눈보라도 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쁘게 그 길을 걸어갈 것이다. 희망이 있는 한 인간은 쉽게 세계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것이 생의 의미이자 로고스다. 그러므로 나의 시여, 슬픔이여, 훨훨 날아가라.